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학병원에서 근무를 하면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하나하나의 다양한 경험들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습니다. 예상보다 환자분의 경과가 좋아 즐거웠던 기억들도 있지만, 그런 기억은 잠시, 좋았던 경험보다는 아쉬웠던 기억들이 훨씬 더 강렬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한번씩 저를 괴롭히곤 합니다. 수련과정을 거치면서 전공의 시절보다는 쌓여진 임상경험들로 일말의 자신감이 쌓여가고 있지만, 여전히 경과가 좋지 못한 환자를 마주할 때면 두려움과 죄책감이 밀려옵니다. 또한 학회에서 여러 교수님들의 성공적인 임상 경험들을 들을 때면, ‘그 때 내가 이렇게 했었더라면…, 그 환자분이 내가 아닌 경험이 풍부한 다른 교수님을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늘 함께 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 의과대학 학생 시절 들었던 강의 내용이 문득 떠오릅니다. 환자의 만족도는 의사의 실력에 비례하고, 의사의 불친절에 반비례한다는 문구, 생각해보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연차가 올라갈수록 환자에게 보여지는 나라는 의사의 모습도 올라간 실력, 딱 그만큼은 불친절하고 무관심해 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전공의 수련 시절, 많은 환자의 주치의를 직접 담당하며, 늘 지저분한 옷차림과 헝클어진 머리로 다소 두서 없는 설명을 하기도 했던 그 때, 늘 정신없이 뛰어다니지만 하루 종일 병실 복도를 왔다 갔다 하던 그 때,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 때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환자 옆을 지키고 있었던 그 시절의 환자와 의사의 관계는 지금의 환자-의사 관계 보다는 끈끈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주치의가 어느 정도의 연차와 실력의 의사인지를 잘 모르던 시절, 투박하긴 하지만 작은 불편감이라도 이야기하면 귀기울여 들어주던 의사, 주치의라는 그 존재 자체로 환자들은 의사를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TV을 켜기만 해도, 십여편의 의학드라마들이 재생되고, 의료 행위와 병원생활에 대한 유튜브 방송들은 연일 쏟아져 나옵니다. 인턴, 전공의, 펠로우, 조교수, 교수 등등 의료진의 자세한 연차에 관한 정보는 이미 대중에게 잘 알려져, 환자와 보호자들은 이제 얼굴과 느낌만 보고도 나의 주치의가 경험이 적은 의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여러 의학드라마에서의 공감과 흥행을 위해 그려진 비현실적인 의료진들의 모습은 좋은 의사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구축되어 실제 의료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의료진의 모습과의 괴리를 만들고, 이는 ‘상대적인 불친절’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넘쳐나는 의학 지식의 업데이트, 진료와 연구 실적에 대한 심리적 압박, 평소의 성격을 바꾸면서까지 고수해야 하는 친절에 대한 높은 기준들. 그러나 문제의 여지는 만들지 말아야 하는, 그 누구도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 적절한 정도의 매너와 감정의 절제. 이 많은 것을 해야하는 선후배들을 보면서, 그럼에도 환자-의사와의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의사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바쁘고 고된 환경속에서도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자 더 나은 치료법을 공유하는, 그럼에도 환자의 경과가 좋지 못하였을 때면 모두 자신의 탓인 듯 고통스러워하는 여러 동료 분들의 바르고 선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던 차에 좋은 취지의 수필 공고가 있어, 작년 겨울 처음으로 글을 투고하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은 제가 임상 진료를 하면서 경험했던 아쉬웠던 순간과 스스로의 다짐을 되새김한 작은 글귀였는데, 영광스럽게도 수필문학상을 받게 되어 저 또한 놀라고 감사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의료진 선생님들도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하셨을 테지만, 아마 조금은 덜 바쁜 제가 글로 남기게 되면서 받게 된 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환자들이 느끼는 의료 현장에서의 의사들의 모습은 아마 무뚝뚝하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애매하고 중립적인 표정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의사가 나의 증상과 병에 관해 정말 관심과 공감을 하는 것일까?’ 하는 착각도 할 것입니다. 같은 시간, 비슷한 내용을 공부하고, 거의 비슷한 하루 일과를 보내며, 비슷한 경험들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저에게는 그 무뚝뚝하고 차갑게만 보이는 얼굴 아래로 미세한 작은 표정의 변화가 누구보다 또렷하게 보이기도 합니다만, 10분 이내의 짧은 시간 동안 만나는 환자들로서는 이러한 의료진의 감정을 느끼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작은 글귀였지만 수필이라는 기회를 통해 보다 많은 의료진 동료 분들의 마음이 잘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큽니다. 저 또한 다른 동료 분들의 수필을 보며, 제가 경험하지 못한 깊이 있는 감정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동료 분들의 일상의 작은 경험들이 공유되어, 보다 많은 환자분들이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 안에 숨겨진, 환자의 임상 경과에 따라 울고 웃는 의료진의 진짜 표정과 미쳐 전하지 못한 진심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도 동료 분들의 글을 통해, 환자의 입장이 되어, 공감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그리고 환자가 되었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인생의 무게와 깊이를 공감하며, 알량한 실력의 발전이 겸손을 뒤덮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며 성장하는 의사가 되어 보려 합니다. 비록 글을 통해서는 아니지만, 임상의로서의 의사가 지녀야 하는 자세와 윤리에 대해 항상 행동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여러 교수님들과 동료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왼쪽부터) 박혜진 문학평론가, 성석제 심사위원장, 장강명 작가
출처 : 청년의사(http://www.docdocdo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