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하지 마세요. 이것은 서예가 아니라 캘리(캘리그라피)입니다.”
페이스북을 하다가 대학 동기이자 이비인후과 의사인 친구녀석이 올린 붓글씨 사진과 글귀가 눈에 띄었다. 서예는 구시대적이고, 캘리그라피는 현대적이므로 본인이 붓으로 쓴 작품(?)은 현대적이라는 의미였으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리타분하게 보이길 원치 않으며, 이는 서예를 취미로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서예대전(국전) 참가 부문에 한글, 한문, 문인화와 더불어 ‘캘리그라피-현대문자미술’이라고 분야가 따로 나눠져 있지만, 사실 calligraphy는 서예, 서법 등 글씨를 통해 표현하는 예술 모두를 통칭하는 것이다.
주변 지인들에게 서예가 취미라고 소개하면 대부분 좋은 취미라 평해주시지만,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서예에 관심이 없는 분들의 입장에서 예상해보건대 서예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 혹은 단어들은 이와 같지 않을까?; 정적이다, 고루하다, 차분하다, 조용하다, 지루하다, 먹물, 족자… 심지어는 내가 쓴 서예를 보고 도포자락과 수염을 휘날리는 모습이 상상된다는 지인도 있었다. 이렇게 쉽사리 고루한 이미지가 박히기 쉬움에도 서예를 취미로 이어나가는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한다
초등학생 시절 서예를 처음 접하긴 했지만, 흥미를 붙였던 것은 대학교 서예 동아리를 하면서 부터였다. 나의 모교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는 ‘행림(杏林)’이라는 서예 동아리가 있다. 행림은 살구나무 숲이라는 뜻으로, 중국 한나라의 동봉(董奉)이란 의원이 환자 치료의 대가로 살구나무를 심게 한 것이 몇 년 뒤에 가서 울창한 살구나무 숲을 이루어 가난한 마을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살구나무는 의사의 인술을 상징하는 나무인 셈이다. 사실 처음에는 서예 자체 보다는 동아리 선배들 인상이 좋고, 술을 잘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다소 불순한(?) 의도로 동아리를 선택했다. 물론, ‘주력(酒力)은 필력(筆力)’이라는 동아리의 숨겨진 모토로인해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술들을 마셔야 했음은 웃지 못할 추억이다. 여튼, 그 선배 중 한 분이 나를 이비인후과에 지원하는데 많은 용기를 주셨고, 결국 서울아산병원 이비인후과 의국 선후배 사이가 되었다. 일면 서예가 이비인후과 의사가 되는데 한 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예과 2년간 틈틈이 서실에 나가 서예를 배웠다. 대구에서는 가장 유명한 서실 중 하나였다. 대구 다수 공공기관에 서실 선생님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서실에는 수제자 2명이 항시 기거하고 있었다. 서실비가 다소 비쌌던 기억인데, 학생 신분으로 항상 금전이 쪼들려 2-3달에 한번 꼴로 서실비를 내고는 했지만, 선생님께서는 항상 모른척 눈감아 주셨다. 서실 한 켠 문이 활짝 열린 선생님의 작업실에서 예술혼을 불태우시는 모습을 보고 서예의 매력에 담뿍 빠졌던것이 지금까지 서예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본과, 인턴, 레지던트 바쁜 시기에는 붓을 놓았다가, 공보의로 복무를 하며 다시 시작했고, 지금은 인사동 서실에서 틈틈이 서예를 배우고 있다.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도 붓을 놓지 않고 꾸준히 배워나갈 생각이다.
흔히 낚시를 좋아하는 분들은 그 ‘손맛’을 잊지 못해 다시 낚시터를 찾게 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낚시를 즐기지 않아 그 ‘손맛’을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니 ‘손맛’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붓과 종이의 마찰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라 하겠다. 붓과 종이의 마찰은 여러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 먹의 종류/농담(濃淡), 붓의 종류/크기, 종이의 재질이 바로 그것이다. 날씨와 습도에도 영향을 받는다. 어떤 날은 퍼지기도, 어떤 날은 갈필이 나기도 하는 획의 변화가 나름 재미있다.
서예는 빈 공간에 먹을 이용하여 글씨를 배치하는 예술이다. 획의 굵기나 글자의 크기도 물론 중요하지만, 짜임새 있는 글씨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획과 획, 글자와 글자 사이를 어떤 간격으로 배치할지가 관건이다. 획과 획간의 간격이 너무 좁아도 너무 넓어도 어색한 글자가 된다. 또한 서예는 글씨이기에 획간의 연결성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한 글자를 완성하는데 대부분은 한 붓에 이뤄지게 되며, 서체에 따라 한 호흡에 2-3자를 써야할 때도 있다. 한 획을 긋고 다음 획으로 넘어갈 때 획간의 간격, 굵기, 길이 등을 생각하여 한번에 써야 하는데 생각보다는 빠른 판단이 요구된다. 그 과정에서 여러 변화를 주어가며 글자가 변하는 양상을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이다. 어떤 날은 붓을 의도적으로 힘있게 눌러보기도, 가볍게 붓끝의 방향을 전환하며 써보기도 한다. 이런 손의 감각과 판단은 수술을 집도하는 나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막연한 기대를 가져본다.
서예 작가들에 비해 아마추어인 나의 필력은 당연히 미천하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내가 쓴 서예를 부끄러워하며 숨겨두고 나만 본다는 것도 재미가 없다. 공연도 관객이 있어야 의미가 있고 신이 나듯, 서예도 내 생각과 마음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고 이를 타인과 공유할 때 의미가 더 커진다고 생각한다. 실력이 부끄러우나마 가급적 빼지 말고 기회가 있을 때 써먹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제까지 몇가지 활용했던 것들을 말씀드려 본다.
휘호(揮毫)는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현장에서 종이 한 장에 한번에 글을 쓰는 일종의 퍼포먼스다. 2019년 3월 신학기 시작을 기념으로 의국원 간 서로 이해하고 돕자는 의미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교수진, 전공의, 외래 직원들이 참석한 의국에서 휘호한 바 있다. (사진 1) 족자로 제작하여 현재 의국 한 벽면에 걸어두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동료 교수님께서 아주 인상 깊은 가훈을 써달라고 부탁을 해주셨다. 수 대를 걸쳐 내려온 가훈은 바로 ‘진선미(眞善美)’. 물결이 흐르는 듯하고 고풍스런 예서체로 가훈을 써드리고, 부탁해주신 감사함에 액자로 제작하여 선물을 해드렸다. 미천한 실력이지만 감사하게도 좋아해주시고, 거실에 걸어 인증샷도 보내주셔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울산대학교 서울아산병원 이봉재 교수님께서 퇴임 후 경상북도 문경시에 귀농하셨다. 2019년 이른 봄 나를 포함한 제자 9명이 의기투합하여 문경 교수님 댁을 방문했었다. 미리 기념이 될 만한 것을 찾다가 서울플러스이비인후과 강진욱 선배님의 기획으로 현판 제작에 돌입했다. 붓펜으로 대략의 개요를 잡고 붓으로 제대로 써보자 했는데, 의외로 붓펜으로 쓴것이 재미있는 요소들이 있어 결국 초안으로 결정되었다. 선배님께서 나무에 새겨주시고 색칠까지 해주셔서 현판을 완성할 수 있었다. (사진 2) 교수님께서 그 현판을 보시며 우리 제자들과의 추억을 떠올려 주실 생각을 하면 부끄러워하며 빼지않고 하길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 2. 문경 이봉재 교수님 댁 현판
‘ENT의 봉우리가 계시는 집’ 이라는 의미를 담아 제작(E봉齋)
학생 시절 동아리에서 연 2회 전시회를 개최했었다. 항상 마감 전날 밤을 새며 작품을 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항상 한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갖은 노력이 들지만, 일단 하나를 완성하면 서예 실력은 계단을 오르듯 향상되기 마련이다. 근자에는 연 1~2회 가량 지역 공모전에 출품한다는 목표를 정하고 한두 작품씩 완성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입선의 기쁨과 성취감은 서예를 향한 또 하나의 원동력이 된다.
사진 3. 충의공 정기룡장군 전국서예문인화대전 상주시장상 수상 (송강선생시)
서예(calligraphy)는 익히는데 시간이 다소 걸리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러하듯 배움의 끝은 없으며, 배움의 과정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잘 쓰던 실력이 모자라던 내 생각과 감정을 붓으로 표현하고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매력적인 부분이라 하겠다. 많은 비용과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고, 연령에 관계없이 꾸준히 할 수 있는 좋은 취미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취미를 찾고 계신다면 서예를 고려해 보시길 권해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