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현 교수는 삼성서울병원에서 정신건강의학을 전공하고 2017년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 뇌과학 박사를 취득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소아청소년정신의학 임상강사를 수료한 이후 2019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임상조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현재까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의 뇌영상 표현형 특징에 관한 여러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주 연구 주제는 틱, 자폐증 및 ADHD와 같은 소아청소년 정신질환의 객관적인 바이오마커의 발굴을 통한 조기 진단 및 중재입니다. 웹진을 통해 이비인후과 영역에서 관찰될 수 있는 정신질환에 대하여 이해하실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요새 제 외래에 오는 아이들 중에는 두통, 어지러움, 이명과 같은 신체적 불편감을 반복적으로 호소하는 아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소아청소년과나 이비인후과를 거쳐서 오는 경우가 많은데 MRI를 찍고 내시경으로 보고 아무리 문진을 해도 명확하게 들어맞는 증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최종적으로 아이들이 호소하는 증상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어려운 경우, 선생님들이 정신건강과 관련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저에게 의뢰를 하여 오게 됩니다.
진료실에서 아이들의 신체적 불편감에 대해서 공감해주면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참으로 다양한 사연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잦은 다툼, 공부에 대한 압박감, 친했던 친구의 무시나 따돌림, 동생을 더 예뻐 하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 등등 아이들 마다 각자가 처한 상황과 스트레스 요인은 아이들의 생김새 만큼이나 제각각 입니다. 그런데 신체증상을 위주로 어려움을 표현하는 아이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미숙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통증에 대해서 설명할 때 다양한 단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흔히 조이는 것 같다, 누르는 거 같다. 찢어지는 거 같다. 얼얼하다. 날카로운 것에 찔리는 거 같다 등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빈도나 심각도, 부위 등을 이야기하며 도움을 요청하지요. 그런데 저에게 오는 많은 아이들은 통증이나 어지러움, 이명 등의 양상에 대해서 설명을 요청받을 때 표현하는 것을 상당히 어려워합니다. 중, 고등학생 정도의 자신의 증상을 잘 설명할 수 있을 법한 아이들도 그냥 힘들어요, 아파요, 설명하기 어려워요, 이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다양한 스트레스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또한 그 순간에 적절한 감정단어를 찾아내기를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상당히 힘들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마치 어제 학원 갔다가 친구들과 편의점에 가서 야식을 먹은 내용을 말하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말투로 이야기합니다.
같이 오신 부모님들은 속이 탑니다. 아이가 아프다고 하니까 학원도 빼 주고, 숙제도 줄여주었는데 여전히 통증의 호소는 계속되거나 더 심해지는 거 같기도 합니다. 학원을 빼 주었더니 이제 학교도 못 가겠다고 하고, 하루 종일 누워 있는 모습을 보이거든요. 쉬라고 방에 들여보냈더니 계속 핸드폰만 하고, 친구와 쉴 새 없이 메신저로 이야기하거나 때로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을 하게 해주면 그때는 흥미를 보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녀석이 꾀병인가 싶어서, 내일부터 학원도 다시 가라고 하고 할 일을 하라고 시키면 다시 끙끙 앓는 소리를 하면서 드러눕습니다. 여기서 부모님과 아이들 사이에 오해가 쌓이곤 합니다.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정신신체의학(Psychosomatic medicine)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심리적 요인, 예를 들어 스트레스, 불안, 우울증이 신체적 증상이나 질병으로 나타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정신적 상태가 신체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은 고대부터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감정 상태가 신체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한 사람이 어떤 병에 걸렸는가 보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1 "Psychosomatic"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초 독일 의사 요한 하인로트(Johann Heinroth)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졌습니다.2 당시에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여, 영혼과 몸이 하나이기 때문에 영혼(psyche)의 고통이 몸(soma)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구체적인 근거까지는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다양한 연구자와 임상의사들이 정신신체의학에 관심을 갖도록 하게 된 동력이 되었습니다.
1940년대에 미국 의사 프란츠 알렉산더는 정신신체장애의 정신분석적 측면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각각의 발달단계에 고착된 성격이 질환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3 예를 들어 구강기에서 발달이 고착된 의존적 성격을 가진 사람은 의존욕구의 조절이 어려워 스트레스를 받고, 위산이 과다 분비되면서 위궤양이 쉽게 걸린다는 것이었지요. 알렉산더의 이러한 주장은 현재는 근거가 부족하여 현대 의학의 영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나 신체의 기능 이상이 인간의 심리와 강한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여 정신신체의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1950년대 미국의 심장내과 의사 마이어 프리드먼(Meyer Friedman)은 프래밍험 심장 연구(Framingham heart study)에서 조바심, 공격성, 성취욕, 인정 욕구 등이 높은 A형 성격으로 평가된 사람은 협심증이나 심근경색에 대한 다른 위험인자를 보정했음에도 여전히 심장질환이 많이 발병한다는 것을 증명하여 신체질환에서 정신신체의학적 접근의 중요성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4
이러한 현상학적인 관찰들은 20세기 들어 감정의 발달에 대한 이해와 신경내분비계의 지식이 축적되며 점차 과학적인 근거를 갖추게 됩니다.5-7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로 인하여 부신에서 스트레스 호르몬 (Cortisol, Adrenaline, Growth factor 등)이 자극됩니다. Cortisol은 NF-κB 등의 transcription 인자를 자극하고, 이는 Inflammatory cytokine 들의 messenger RNA (mRNA) 전사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5 마치 우리 몸이 생존이 필요한 위기상황에 빠져 있는 것과 같이 작동하지요. 그리고 뇌의 편도(Amygdala), 해마(Hippocampus) 등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중요한 부위에 시냅스 증가를 일으키고, 스트레스 상황을 예측하거나 감정 반응을 증폭하는 역할을 합니다.6 그리고 Adrenaline 은 교감신경을 자극하고 전신의 신체 각성을 일으켜 감각신경을 예민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심박수, 혈압, 호흡수 등을 빠르게 하고, 상대적으로 소화기관의 기능을 떨어뜨리게 합니다.7
Schematic representation of the central and peripheral components of the stress system, their functional interrelations, and their relation to other central nervous system components involved in the stress response. 8
스트레스가 잠시 있다가 해결되는 경우는 이와 같은 반응이 짧게 지나가지만, 현대 인간은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적응요구, 경제적인 스트레스, 학업과 성취에 대한 압력, 단절되어 가는 관계 등 무엇 하나 쉽게 해결이 안되는 문제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지속적인 신체 각성으로 인한 두통, 감각예민성, 심박 및 혈압 증가 등의 불편한 신체증상을 일으키고, 스트레스가 지속될 것에 대한 예측을 확신하게 함으로써 무력감, 우울감, 불안감 등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아이들이 유독 스트레스 상황을 신체증상으로 표현하는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감정의 발달과 표현이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인에 비해서 아이들은 감정표현의 다양성이 적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유아동기에는 울거나 떼쓰거나, 소리지르는 행동으로서 감정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은 정서적 경험을 하는 상황에서 그동안 배웠던 감정 단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를 타당화 하는 주변사람의 반응을 통하여 감정을 세분화하고 감정체계를 성숙시키게 됩니다. (아, 이런 감정이 억울한 거구나! 이런 감정이 외로운 거구나!) 그렇기 때문에 감정체계 성숙의 정도나 표현 방식은 사람마다 큰 차이를 가집니다. 9
그런데 만약 아이들에게 감정을 억압하는 분위기, 말, 행동 등을 많이 경험하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돌봄을 제공하는 어른이 주위에 별로 없거나, 너무 바쁘거나, 무심하여 감정표현의 기회를 제공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감정을 어떻게 다룰까요? 많은 경우,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들은 불쾌한 감정을 참는 방식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자주 사용하지 않는 근육은 약해지듯이 감정을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그 감정에 대한 인식이나 표현이 점차 저하됩니다. 심한 경우 아이들은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에 빠지기도 합니다. 스트레스는 그대로인데, 감정표현이 억압되어 있는 아이들은 문제 상황에 대처를 하기도, 도움을 청하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겉으로는 별 문제없어 보이는 아이들이 우울, 불안 등의 불편한 감정은 속으로만 경험하면서, 점차 스트레스에 의한 신체반응 – 정신신체장애 – 은 심해지고 잘 낫지 않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두통, 어지러움, 이명 등으로 외래 진료에 오는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까요? 우선 충분한 검사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중대한 신체질환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아이들도 자신이 경험하는 증상이 걱정스럽고 두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큰 병이 없다는 것을 알면 안심이 되니까요. 그리고 나서 조심스럽게 아이와 보호자에게 스트레스 반응이 의심된다고 알려주시고 정신건강의학과 평가를 의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다각도로 아이의 증상을 살펴보게 됩니다. 스트레스 요인과 기간,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 반응과 일상생활의 영향, 감정 인식과 표현 정도, 부모님, 주변인들과 상호작용 수준 등을 상담을 통해 알아봅니다. 그 후 심리검사나 심박변이도 검사 등을 통해서 마음 상태를 점검하고 객관적인 데이터로 이해를 돕도록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치료 메커니즘은 상담시간 동안 감정을 읽어주고 타당화하는 과정을 통해 감정 분화를 돕고, 자신의 감정상태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여 감정체계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부모님을 위한 심리교육도 같이 진행하게 됩니다. 먼저 아이들이 보여주는 신체증상이 단순히 꾀병이 아님을 알리고 만성적인 스트레스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충분한 평가가 있었다면 신체 증상 자체에 너무 놀랄 필요도 없고, 너무 무시할 필요도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그저 불편한 상황에 대해서 공감해주지만, 그로 인해 일상생활이 무너지고 병원에 의존하게만 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스트레스 요인을 차단할 필요도 없다고 설명합니다. 증상 조절을 위해서 약물치료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감정체계의 성숙을 위하여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아이의 생각과 느낌을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알려드립니다. 물론 상호작용의 방식이 금방 변화되기는 어렵지만 아이들이 하는 말에 집중하고 경청하면서, 표현한 생각과 느낌에 너무 빠른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음을 타당화해 주시면 좋겠다고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 과정이 상당한 시간을 요구하지만, 분명히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것을 같이 말씀드리며 희망적인 메시지로 마무리합니다.
몸의 아픔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아이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경쟁적인 환경 속에서 수많은 지식들을 배워야 하는 현재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감정을 살피고 이야기할 시간적 여유가 많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거 같습니다. 선생님들께서도 진료와 업무로 많은 시간 바쁘시겠지만 오늘은 잠시 시간을 내어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부분에 관심이 있는지 알아보고 감정을 읽어주는 소통의 시간을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인 부모님의 인정과 존중이 동반될 때 자신감과 편안함, 그리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