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에서 이비인후과 전공의 1년 차로서 첫발을 내디뎠을 때만 해도 저는 제 앞날이 병원이라는 공간 안에서만 흐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2024년
대한민국 의-정 사태라는 거대한 파도는 저를 포함한 많은 전공의를 병원 밖으로 이끌었습니다. 사직서를 내고 돌아선 뒤 마주한 일상은 평온하기보다 불안과 스트레스로 가득했습니다. 그때 제
삶에 들어온 것이 실내 클라이밍, 그중에서도 ‘볼더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잡념을 없애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었지만, 어느덧 저는 매일 암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사직한 동기들과 손바닥이 벗겨지도록 벽에 매달리던 시간은 단순한 운동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우리는 병원 밖의 낯선 환경 속에서 서로를 응원하며 심리적 안정을 찾았고, 반복되는 등반을 통해 전공의 시절 부족했던 체력과 근력을 차근히 길러 나갔습니다. 2025년 9월,
다시 이곳 순천향서울병원 이비인후과 전공의 2년 차로 복귀한 지금도 클라이밍은 제 생활의 가장 큰 활력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흔히 클라이밍이라고 하면 거대한 자연 암벽을 타는 모습만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클라이밍은 그 목적과 방식에 따라 여러 장르로 나뉩니다. 우선 15m 이상의 높은 벽을 로프를 매고 오르는 ‘리드(Lead)’가 있습니다. 등반자의 지구력과 고도감을 이겨내는 정신력이 핵심입니다. 반면 제가 주력으로 삼는 ‘볼더링(Bouldering)’은 4.5m 내외의 낮은 벽에서 로프 없이 오직 바닥의 매트만을 안전장치 삼아 오르는 종목입니다. 구간은 짧지만 동작 하나하나에 폭발적인 힘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 장르들은 다시 환경에 따라 나뉩니다. 실내에서 인공 홀드를 이용하는 방식 외에도, 자연 속의 거대한 바위를 타는 자연 볼더링과 절벽을 오르는 자연 리드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아무런 안전 장비 없이 오직 맨몸으로 등반하는 ‘프리솔로(Free Solo)’는 클라이밍의 가장 원초적이고 위험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처럼 클라이밍은 자신의 성향과 역량에 따라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 무궁무진한 스포츠입니다.
실내 볼더링의 핵심은 단순히 벽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벽 앞에 서서 경로를 설계하는 ‘루트파인딩(Route Finding)’에 있습니다. 벽에 붙기 전, 어떤 홀드를 잡고 어떤 순서로 발을 디딜지 머릿속으로 입체적인 지도를 그려야 합니다. 이는 마치 복잡한 수술을 앞두고 환자의 해부학적 구조를 면밀히 분석하며 수술 단계를 복기하는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여기서 볼더링의 가장 매력적인 지점이 드러납니다. 문제를 출제한 ‘세터(Setter)’가 의도한 정석적인 해법(Beta)은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등반자가 반드시 그 의도에 자신을 끼워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키가 큰 사람은 먼 거리의 홀드를 한 번에 낚아채기도 하고, 유연성이 좋은 사람은 남들이 생각지 못한 각도로 다리를 올려 무게 중심을 잡기도 합니다.
손가락 끝의 힘이 강한 사람은 아주 작은 ‘크림프(Crimp)’ 홀드를 견뎌내며 직진하고, 손바닥 전체의 마찰력을 잘 이용하는 사람은 미끄러운 ‘슬로퍼(Sloper)’나 꼬집듯 잡아야 하는 ‘핀치(Pinch)’ 홀드에서 강점을 보입니다. 잡기 편한 ‘저그(Jug)’나 한두 손가락만 들어가는*‘포켓(Pocket)’을 어떻게 조합하느냐는 등반자의 자유입니다. 출제자의 의도와 다르더라도, 각자의 신체 조건과 역량에 맞춰 어떻게든 ‘완등(Top)’에 도달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정해진 정답이 없는 벽 위에서 나만의 해답을 찾아내는 과정은 큰 성취감을 안겨줍니다.
클라이밍의 스타일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세를 정밀하게 통제하며 한 동작씩 견고하게 나아가는 ‘스태틱(Static) 스타일’, 이른바 올드스쿨 방식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벽 위에서 달리고 도약하며 탄력을 이용해 다음 홀드로 몸을 날리는 ‘다이나믹(Dynamic) 스타일’이 대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대의 볼더링은 단순한 등반을 넘어 체조에 가까운 화려한 움직임을 요구하며 보는 이들에게도 큰 박진감을 선사합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의 기량을 보유한 대한민국의 이도현 선수가 있습니다. 2025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서 그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한국 클라이밍의 위상을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특히 이도현 선수가 일본의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하며 서로의 등반을 지켜보고, 상대의 완등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승패를 떠나 ‘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는 동료로서 나누는 선의의 경쟁은 이 스포츠가 가진 건강한 에너지를 잘 보여줍니다.
전공의 2년 차로 복귀한 이후, 병원 업무는 여전히 고되고 때로는 퇴근 후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암장에 들러 초크 가루를 손에 묻히고 벽에 매달리는 순간, 하루 동안 쌓였던 정신적 피로가 땀과 함께 씻겨 내려가는 것을 느낍니다. 사직 기간 동안 길러진 기초 체력은 수술방에서의 긴 시간을 버티는 밑거름이 되었고, 벽 위에서 배운 ‘나만의 길을 찾는 유연함’은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로서의 사고방식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중력을 거스르며 한 단계씩 위로 향하는 볼더링처럼, 저 역시 이비인후과 전공의로서 마주하는 여러 난제들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려 합니다. 혹시 복도에서 초크 가루가 살짝 묻은 제 손을 보신다면, 병원이라는 거대한 벽을 함께 오르고 있는 동료로서 따뜻한 눈인사를 건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볕이 잘 드는 클라이밍장은 기분이 좋다.
널찍하고 카페 같은 분위기의 클라이밍장
알록달록한 색깔의 홀드들이 예쁘다.
잘 나온 사진 한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