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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NTian May 2026

긴 시즌을 버티는 마음 한림대학교 강남성심병원 이비인후과 박상철

[의사 가운 뒤에 숨겨진 전력분석원의 자아]

오래전, 제가 미생물학교실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으며 실험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실험실의 한 연구원이 제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만약 의사가 안 되셨다면 뭐 하셨을 것 같아요?”

저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야구기자나 전력분석원을 하고 있었겠죠.” 제 말에 연구원이 "오~ 정말 잘 어울리시는데요!" 라고 맞장구를 쳐주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자랑할 만한 취미가 많은 것도 아니지만, 야구만큼은 꽤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즐겨보고 있습니다. 전력분석원이 되고 싶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제 전력부터 분석해보면 운동 능력은 평균 이하, 순발력은 의심스러움, 대신 경기 후 기록 찾아보는 집요함은 우수한 편입니다.

[도시의 표정을 닮은 야구장들]

여행을 가면 유명한 전망대나 박물관도 좋지만, 저는 시간이 허락하면 그 도시의 야구장을 찾아갑니다. 한국, 미국, 일본의 야구장을 하나씩 찾아가 보는 것이 제 버킷리스트가 되었습니다.

먼저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장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박찬호, 류현진, 이정후 등 많은 한국 선수들의 활약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메이저리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야구장은 신기하게도 그 도시의 성격을 약간 닮아 있습니다.

샌디에이고에 있는 Petco Park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홈구장으로, 캘리포니아 특유의 햇빛과 여유가 느껴지는 편안한 곳이었습니다 (사진 1).

사진 1. (좌) Petco Park의 전경 (우) 경기장에서 보이는 캘리포니아 바다와 건물들

뉴욕 양키스의 Yankee Stadium은 ‘야구의 메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웅장했습니다. Great Hall이라고 불리는 넓은 공간이 있는데, 크게 걸린 선수들의 사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진 2).

사진 2. (좌) Yankee Stadium의 전경 (우) Great Hall에 있는 선수들의 사진

덴버에 있는 Coors Field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구장입니다. 대표적인 타자 친화적인 구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다른 야구장이었으면 외야 플라이로 잡힐 공이 홈런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발 고도가 1마일(1609m)이나 되는 고산지대에 위치하여 ‘Mile High City’라고 불리는 덴버의 특징 때문인데요, 공기의 밀도가 낮아서 저항이 적으니 타구가 멀리 날아가서 그렇다고 합니다 (사진 3).

사진 3. (좌) Coors Field 입구 (우) 외야 관중석 옆에 있는 나무와 호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 홈구장인 Camden Yards는 우측 외야 밖에 있는 벽돌 건물 (옛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 창고)이 눈에 띄는 곳이었습니다 (사진 4).

사진 4. (좌) Camden Yards의 전경 (우) 구장 투어 때 볼 수 있었던 골든글러브

일본은 각 야구장마다 독특한 응원 문화가 있습니다. 도쿄에 있는 메이지진구 야구장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홈구장입니다. 야쿠르트가 득점을 할 때마다 다같이 응원가를 부르며 우산을 위아래로 흔들며 응원하는 모습이 흥미로웠습니다 (사진 5).

사진 5. (좌) 야쿠르트 스왈로즈 선수가 홈런을 치자 (우) 다같이 우산 응원을 합니다

국제 대회를 많이 치러서 잘 알려져 있는 도쿄돔은 'Big Egg' 라는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홈구장으로 쓰고 있고, 구단의 상징 색깔인 주황색 타올을 흔드는 응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진 6).

사진 6. (좌) 큰 달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도쿄돔 (우) 주황 물결로 가득한 관중석

지바 롯데 마린스의 홈구장을 방문했을 때는 마침 유니폼데이였습니다. 지바롯데의 선수와 팬들이 모두 빨간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응원석 전체가 하나의 붉은 물결처럼 보이던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진 7).

사진 7. ZOZO Marine Stadium으로 불리는 지바 롯데 마린스 홈구장, 과거 QVC Marine Field 시절의 모습

한국 프로야구는 젊은 팬들이 많아지면서 주말에는 티켓을 구하기 힘들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운 좋게도 제가 응원하는 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하던 순간을 직접 야구장에서 봤던 적이 있습니다. 축제 분위기 속에서 응원가를 부르던 그 날은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이었습니다.

[실패해도 다시 타석에 서는 사람들]

이처럼 수많은 야구 경기를 지켜보다 보니, 그라운드 위의 모습이 어느새 제 본업인 진료실과 연구실의 풍경과 묘하게 겹쳐 보이곤 합니다. 야구 팬들이라면 누구나 응원하는 팀의 실책과 병살타를 보며 뒷목을 잡을 때가 있습니다. "다시는 야구 보나 봐라"며 화를 내면서도, 다음 날 아침이면 귀신같이 스포츠 기사를 확인하고 오늘 선발투수는 누구인지 체크합니다. 이런 야구팬들의 모순적인 모습에서 저는 묘한 회복 탄력성을 봅니다. 어쩌면 야구는 우리에게, 실패하고도 다음 날 다시 기대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스포츠인지도 모릅니다. 야구라는 이 잔인하고도 매력적인 스포츠를 오래 들여다보면, 우리의 일상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타자도 매번 안타를 칠 수는 없습니다. 10번 중 3번만 성공해도 3할 타자로 인정받지만, 그 말은 반대로 10번 중 7번은 실패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삼진을 당하고, 병살타를 치고,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나도 다음 타석은 또 찾아옵니다. 연구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평범한 연구자들은 한 번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고, 공들여 쓴 논문도 accept되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그 실패가 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데이터를 다시 들여다보고, 가설을 고치고, 문장을 다시 쓰며 다음을 준비합니다. 야구를 오래 보다 보면 실패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실패 이후에도 다시 준비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야구를 보며 가장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은 부상으로 긴 시간을 보낸 선수가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올 때입니다. 긴 재활 과정을 버티고 다시 마운드에 오르거나 타석에 서는 장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울림이 있습니다. 화려한 홈런이나 멋진 삼진도 좋지만, 저는 그런 복귀 장면을 볼 때 야구가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견뎌낸 시간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야구는 혼자 잘해서는 완성되지 않는 경기입니다. 투수, 포수, 내야수, 외야수, 감독, 코치, 트레이너까지 각자의 역할이 맞물려야 한 시즌을 버틸 수 있습니다. 병원과 연구실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혼자 잘해서 되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고,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루의 진료와 하나의 연구가 잘 진행됩니다. 병원을 돌아보면 강속구만 던지는 에이스 투수 같은 선생님도 계시고, 묵묵히 컴플레인을 다 받아내는 골드글러브급 포수 같은 선생님도 계십니다.

오래 준비하고, 끝까지 버티며, 결국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작년 월드시리즈에서 LA 다저스의 야마모토 요시노부가 보여준 투구는 참 인상 깊었습니다. 그는 작은 체구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만의 독특한 훈련법과 투구 메커닉을 끊임없이 다듬어 온 선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완투승을 했고, 6차전에서 선발로 96개의 공을 던지며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7차전의 중요한 마무리 순간에 다시 마운드에 올라 마지막 2⅔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습니다. 그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오래 준비한 사람의 집념이 보였기에 감동과 여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긴 시즌을 버텨낼 우리 모두의 내일을 응원하며]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야구계의 유명한 명언이 있습니다. 오늘의 패배가 내일의 경기를 지워버리지는 않습니다. 삼진을 당한 타자도 다시 타석에 서고, 부상당한 선수도 재활을 거쳐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옵니다.

진료와 연구도 결국 긴 시즌을 버티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환자의 호전은 때로 천천히 나타나고, 연구의 결과는 자주 기대를 빗나가며, 논문은 여러 번 고쳐 써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다음 외래를 보고, 다음 실험을 준비하고, 다음 원고를 다시 씁니다. 그래서 저는 야구를 볼 때마다 위로를 받습니다.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고, 기다린 사람에게는 언젠가 다시 타석이 온다는 것을 야구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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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진
맘을 울리는 글 감사합니다! 긴 시즌을 함께 버텨봅시다.
(2026-06-04 14:28) 수정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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