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 때 랩 음악을 통해 힙합 문화를 처음 접하였다. 처음에는 솔직히 음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사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고 많은 곡들의 주제나 가사 또한 당시 내게는 너무 자극적이었다. 하나, 당시에는 주위 친구들이 멋있다고 하니까 무언의 또래 압박을 못 이겨 힙합 음악들을 듣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계속 듣다 보니 이에 익숙해졌고 결국 이런 류의 음악을 진정으로 즐기게 돼 고등학교 때는 내 플레이리스트를 힙합 음악으로만 채웠었다. 의예과에 진학한 후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음악을 디깅 (digging) 하기 시작하였고 처음으로 작사 및 녹음을 시작하였다.
그럼 나는 왜 힙합 음악을 좋아하느냐?
일단 힙합 음악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나 나는 그중 아티스트들의 생각 혹은 믿음 등이 묻어 있는 곡들을 좋아한다. 나는 이런 류의 음악이 가장 솔직한 음악이라 생각하여 좋아한다. 사회생활을 할 때는 본인은 종종 숨기면서 하고 싶은 말들도 못하고, 본인의 생각을 표현을 못 할 때가 많다. 하나, 힙합 음악 안에서는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침없이 본인의 생각, 믿음 혹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 다른 장르의 음악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가 내제되어 있다. 또한, 음악의 형태도 매우 자유롭다. 라이밍(rhyming)이라는 “최소한의 규칙”만 유지하며 아티스트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본인만의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다 (어떤 곡들에서는 이 최소한의 규칙인 라이밍마저 지키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힙합 음악을 거칠거나 매우 투박한 음악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지만 내게는 오히려 이런 점들이 매력적이다.
“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최근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님이 아카데미상 수상식 때 언급하여 더 유명해진 마틴 스콜세지 감독님의 말이다. 나도 그동안 음악을 듣고 내 가사들을 녹음하면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티스트가 본인의 이야기를 가장 솔직하고 자유롭게 할 때 그 음악은 진정 매력 있어지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곡에서 내가 겪은 일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게 된다. 노래가 끝나면, 마치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 마냥 그동안 나도 모르게 억눌렸던 감정들이 해소된 경험을 많이 하였다. 어떤 삶의 문제에 대한 뚜렷한 해결안이 노래에서 제시되지 않아도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문제를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며 많은 용기를 얻을 때도 있었다. 또 어떨 때는 음악을 통해 나와는 다른 생각들을 엿듣고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들을 간접적으로 겉핥기 식이라도 경험할 수 있어 흥미롭다.
나는 이런 힙합 음악들을 듣고 자라면서 이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가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내 이야기와 생각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공감을 얻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의예과 1학년 때부터 유튜브에서 비트를 다운로드해 가사를 조금씩 쓰기 시작하였다. 가사를 쓸 때 라임 맞추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 자체가 일종의 “언어놀이”처럼 느껴져 매우 즐거웠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조금이라도 비슷해지려 가사들에 최대한 나의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담으려 노력하였다. 가사를 쓰면서 내 생각들과 감정들을 많이 정리하였다. 더불어, 이전에 썼던 가사들을 읽으면서 내가 평소 잊고 지냈던 생각 또는 목표들을 다시 되새기며 내가 나아가는 방향도 종종 잡았다. 신경외과 전공의 시절에는 운동을 할 시간과 체력이 없어 그나마 당직실에 앉아 가사 쓰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풀었던 것 같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가사들은 점차 늘어났고 이 가사들을 비트 위에 녹음하고 앨범 단위로 묶어 믹스테이프 (mixtape, demotape)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사실 의대생 때부터 믹스테이프를 만들려고 수 차례 시도하였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었다.
첫 번째 시도는 본과 4학년 2학기 OSCE/CPX 시험 보기 전이었다. 혼자 집에서 녹음, 믹싱, 마스터링을 시도하였으나 랩 실력은 물론 녹음을 하고 이를 가공하는 실력이 너무 부족하여 실패하였다. 그 후 국시를 보고 인턴을 시작하면서 믹스테이프를 만들어야겠다는 목표는 흐지부지되었다. 두 번째 시도는 신경외과 합격한 후 12월 인턴 때 1주일 동안 나온 휴가 때였다. 짧은 시간 내 믹싱과 마스터링을 배우고 시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간은 부족한데 모인 돈은 조금 있으니 남의 재능을 돈을 사서 나의 단점을 극복하려 하였다. 이에 홍대 외곽에 있는 한 녹음실을 빌리고 엔지니어 한 분을 고용하여 녹음을 하고 믹싱과 마스터링을 맡겼다. 하나, 녹음실에서 하는 녹음은 처음이어서 많이 우왕좌왕하였다. 힘들게 2~3곡 녹음을 겨우 끝내니 내 휴가는 끝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인턴/전공의 80시간 제도가 없어 일주일에 많게는 120시간씩 일해야 하는 스케줄을 소화했어야 하므로 평일에는 녹음할 시간이 없었고 오프 때는 잠을 자기 바빴다. 세 번째 시도는 신경외과 전공의 4년 차 여름휴가 때였다. 이때는 연습이 부족하고 녹음 당시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군의관이 돼서야 믹스테이프 2장을 드디어 완성하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이 믹스테이프들은 내가 10년 넘게 진행한 프로젝트로 내게는 매우 소중한 앨범들이다.
내 예명은 Thought Donor이다. 나의 가사를 통해 내 생각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번에 만든 믹스테이프들은 2015-2019년 내가 신경외과 1년 차 때부터 4년 차 그리고 군의관 첫 해에 적었던 가사들을 추려서 일종의 일기 형식으로 만들었고 앨범 타이틀은 이에 맞게 『 Diary in Bars 』로 붙였다. 총 21곡이며 10곡, 11곡 나눠서 각각 파트 1, 파트 2로 정리하여 두 개의 믹스테이프를 만들었다.
사실 이 믹스테이프들을 만들 때 크고 작은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 일단 취미로 랩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가끔씩 솔직히 조금 눈치 보였다. 괜히 나를 안 좋게 보고, 특히, 의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랩을 한다는 것에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나 그보다 나는 이번 믹스테이프들에 들어간 가사를 적는 과정이 무엇보다 힘들었다. 나에게는 매우 강렬했던 신경외과 전공의 시절 당시 내가 겪었던 일들, 생각들 그리고 감정들을 솔직하게 풀어내는 것이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가사를 쓸 때 눈치를 보게 되고 나도 모르게 표현들을 순화시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았다. 평소 들어내지 않았던 것들을 남들 앞에서 들어내는 것은 마치 발가벗겨진 상태로 노출된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최대한 “나 자신”을 이번 앨범이 담으려 노력을 많이 하였다.
나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칭하는 것 또한 내게는 부담스러웠다. 나 자신에게 갖고 있던 편견들을 많이 깼어야 했고 내가 진짜 예술가가 된 것 마냥 자기 최면을 걸고 녹음에 임했어야 했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일단 결과물을 내놓자”라는 생각을 머릿속 수십 번 되뇌어야 했었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걱정과 두려움을 핑계 삼아 내가 정말 해보고 싶었던 일을 못 해보면 후회가 정말 많을 것 같아 일단 할 수 있는 것이라도 다 하려 노력하였다. 또, 실질적인 결과물이 있어야 추후 이를 딛고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에 한 편의 논문을 쓰는 심정으로 기계적으로 일을 진행한 부분들도 많았다.
나는 내 곡들이 모두 완벽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분명히 장점은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이 곡들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인 것 같다. 신경외과 의사가 본인의 전공의 시절 경험을 가사로 푸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음악을 들었던 많은 분들께서 내 딜리버리에 대해 좋은 피드백을 주셨다. 내가 생각하는 내 곡들의 단점은 일단 모두 분위기가 비슷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는 보통 내가 2/4리듬의 정박자를 따라 랩을 구사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에 나도 가사를 쓰면서 계속 내 플로우에 변화를 주려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실질적인 결과물들이 나와 나는 만족하고 있다. 가사를 쓰고 최종 녹음하고 영상을 만드는 것까지 모두 내게는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남은 군의관 시절 때 믹스테이프를 1-2장 더 내고 싶다. 나의 최종 목표는 음원사이트에 내 오리지널 곡을 한 곡 이상 올리는 것이다. 카페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내 곡이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하는 남다른 로망이 있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가사를 쓰면서 연습하고 있다. 추후 나올 Thought Donor의 곡들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 유튜브, SOUNDCLOUD에 “THOUGHT DONOR”로 치시면 곡들을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