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근무하는 연구소는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UCI)에 소속된, Hearing and Speech Lab이다. UCI는 10개의 University of California대학들 중 비교적 최근에 설립된 대학으로 1965년에 개교하였다. 이 지역에 개미가 워낙 많아 마스코트는 개미핥기(Anteater)라고 한다. 본 연구소는 Dr. Fan-Gang Zeng 교수가 책임을 맡은 연구소로서, 사람의 청각과 언어, 이명에 대한 연구들을 진행하고 있다. 본 실험실과 인연 깊은 연구자로는 Dr. Zeng 외에도 Dr. Arnold Starr와 Dr. John Middlebrooks가 있다. Dr. Arnold Starr는 청신경병증(auditory neuropathy)의 개념을 처음으로 구체화하고 발전시킨 UCI연구자이다. 지금은 퇴직했지만, 본인이 키운 과일을 선물로 들고 가끔 랩에 찾아오기도 한다. Dr. John Middlebrooks는 auditory signal segregation의 기전에 대한 고양이 연구로 잘 알려져 있으며, 2013년 Association for Research in Otolaryngology (ARO)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Dr. Zeng은 공학을 기반으로 한 청각연구자로서 인공 와우 개발 초창기부터 내이의 전기적 자극과 장비 제작에 대한 공학적인 연구를 활발하게 수행해 왔다. 2006년 Nurotron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였고, Venous 인공와우를 개발하여 지금까지 6000여 명의 환자들이 본 장비로 이식을 받고 사용 중이다. 국내에는 아직 Nurotron이라는 인공 와우가 생소하지만, 중국 시장에서는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사업이 매년 확장 중이라고 발표되고 있다.
장기연수 기간 중 어떤 내용을 조금 더 깊이 공부하면 좋을지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 ARO학회의 발표 내용들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크게 단순화시키면, 선택의 방향이 2가지로 나뉘어지는 것 같았다. 첫째는 생물학적 기반을 둔 분야, 둘째는 공학적 기반을 둔 분야이다. 의학교육을 주로 받아온 내 입장에서는 생물학적인 연구가 어쩌면 조금 더 익숙하고 이해가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소중한 장기연수 기회에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연구를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더불어 나를 지도해주신 스승님 두 분께서도 Hearing and Speech Lab을 추천해 주시어, 부푼 꿈을 가지고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림1.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UCI) 학생회관 앞에서
그림2.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UCI) 마스코트 개미핥기(Anteater)
미국에 몇 달 정도 연구를 하면서 우리나라와 다르다고 느낀 점 한 가지는 미국 사회, 학계, 연구자들의 다양성이었다. 내가 속한 Hearing and Speech Lab에는 박사후 연구자 코스를 밟고 있는 동료가 3명이 있는데, 모두들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 같은 사무실을 사용하는 첫 번째 연구자는 아랍 에미레이트와 이집트에서 공부한 의사로서, 벨기에에서 청각학 박사를 취득하고 미국 동부에서 청각 연구를 하던 중 UCI로 스카우트되어 이직한 박사후 연구자이다. 두 번째 연구자는 텍사스에서 뇌신경계 분자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분으로 비침습적 전기적 자극으로 언어를 전달하고자 하는 연구를 수행 중이다. 세 째 연구자는 호주 시드니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박사후 연구를 위해 본 실험실로 유학을 온 연구자였다. 본 실험실에는 그 외에도 박사 과정 학생과 다수의 학부생들이 참여하고 있다. 더불어 미국에서 내과 레지던트 생활을 막 시작하는 한국인 연구자도 한 분 있는데, 이분은 보건의료연구를 전공한 연구자이자 의사이다. 연구실 책임 교수가 공학 기반의 연구자임을 감안하면 나를 포함하여 정말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연구자들의 모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담으로 두 번째로 소개한 박사후 연구자는 조만간 독립적인 책임자로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여러 연구비를 신청하는 중인데, 그분의 설명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잘 수행하지 않는 분야를 연구하는 후보일수록 그리고 사회적 인종적 출신 배경이 기존 연구자들과 다른 후보일수록 연구비를 수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녹색성장, 창조경제,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과 같이 시대적 흐름을 잘 반영한 연구가 연구비를 수주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과 다소 차이가 있다고 느껴졌다.
UCI에 근무하면서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내용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로봇을 이용한 음식배달 서비스 StarShip-UCI이다. 본 캠퍼스는 618헥타르로서 여의도 크기의 2배 정도 되며, 대부분의 식당은 학생회관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그림3. 로봇을 이용한 음식배달 서비스 StarShip-UCI
점심시간에 학생회관에 직접 가서 식사를 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또 다른 옵션은 StarShip-UCI서비스를 통해 점심을 배달시키는 것이다. 이 서비스는 앱을 통해 점심 메뉴를 선정하고 결제를 진행하면, 작은 전기차량을 이용해 연구실 앞까지 음식이 배달되는 방식이다. 전기차량은 작은 의자 정도 크기이며 6개의 바퀴를 통해 무인 자동차처럼 스스로 목적지까지 찾아가게 된다. 이용 방법은 우선 앱을 통해 음식을 주문한다. 음식이 준비되면 전기차량은 학생회관에 있는 해당 식당 앞으로 이동하여 대기한다. 식당 직원이 음식을 들고 나오면 뚜껑이 열리고 음식을 넣으면, 문이 잠긴 상태에서 이동을 시작한다. 전기차량은 계단이 없는 길만을 미리 선별하여 사람 보행 속도와 비슷한 속도로 인도를 통해 이동한다.
전기차량이 목적지에 도착하면, 음식을 배달시킨 앱에 알람이 울린다. 음식을 주문한 사람에게 비밀 번호가 전송되고, 주문자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문이 열리면서 음식을 꺼낼 수 있다.
문을 닫으면 전기차량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충전 장소로 돌아가게 된다. 정해진 금액보다 많은 음식을 주문하게 되면 (보통 2인분 이상) 배달료는 공짜라고 한다. 넓은 캠퍼스와 미국의 비싼 인건비를 생각하면 현실성이 있는 서비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작은 전기차량이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귀여우면서도 미래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본 대학의 또 다른 생소한 사실은 캠퍼스 중앙에 학교가 직접 운영하는 컴퓨터 게임방이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학생회관 건물 1층의 화려한 조명아래 수 많은 컴퓨터들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계속 지나다니면서 자세히 보니 UCI eSports Arena라는 게임방이었다. UCI는 컴퓨터 게임도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문적인 분야라고 생각을 하고 2016년 학교 차원에서 투자를 하여 전략적으로 컴퓨터 게임 전공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개설하였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컴퓨터 공학과나 프로그램 코딩을 배우는 프로그램이 아니고, 실제 직업적으로 게임을 하는 게이머들이 입학하고 게임 실력을 수련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League of Legends라는 게임 대회에서 수상한 학생 10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입학을 받아 프로그램을 더욱 활성화하고 있다고 한다. UCI eSports Arena는 누구나 사용료를 지불하고 사용할 수 있으며, League of Legends, PubG Battlegrounds, Overwatch 같은 유명 게임들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아직까지 시설을 이용해 보지는 못했지만,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다. 우리나라도 컴퓨터 게임 시장과 프로게이머 양성이 매우 발달한 국가이지만, 대학에서 이렇게 게임방을 운영하고 전공 프로그램을 개설한다는 것은 신기한 개념이었다.
그림4. 대학에서 직접 개설, 운영하는 게임방 UCI eSports Arena
마지막으로는, UCI캠퍼스를 포함하여 Irvine시에에서 시범 운영되고 있는 자율주행택시 PonyPilot BotRide이다.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합법적으로 운행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서비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택시를 자율주행 자동차로 운영하는 개념이다. 아직은 캠퍼스와 가까운 지역의 제한된 공간에서 운영 중이지만, 실제 도로에서 일반 차량, 버스, 자전거, 보행자들 사이로 BotRide 차량이 운행되고 있다. 사용자는 Uber와 비슷하게 스마트폰 앱을 통해내 위치와 목적지를 입력하고 차량을 호출한다. 운행되는 차량이 얼마나 있고, 특히 주변에 몇 대의 빈 차량이 대기하고 있는지가 실시간으로 보여 진다. 차량을 호출하면 정해진 약속장소로 차량이 도착하고, 사용자가 차에 탑승하면 차량이 스스로 운전하여 목적지까지 운행을 시작한다. 아직은 시범운영 단계라 모든 차량에 비상시 대처를 위한 운전자가 탑승해 있다. 그러나 운전자는 비상상황에서만 개입을 하고,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차량이 스스로 판단하여 운행한다. 시범사업 기간 동안은 탑승료가 공짜라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다. 본 서비스가 완성되면 Uber보다 저렴한 요금의 차량공유 서비스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래를 개척하는 이런 도전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가지 생각할 점은 본 서비스가 한국 기업인 현대 자동차가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PonyAI라는 중국회사의 인공지능 자율주행 솔루션을 이용하여 현대자동차가 함께 참여, 투자하여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이런 도전이 불법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해외에서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다소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림5. 자율주행차량을 이용한 택시 PonyPilot BotRide
한국보다 1-2달 뒤 늦은 2020년 3-5월, 미국도 COVID-19로 인한 큰 변화가 있었다. 정말 순식간에 초중고 학교가 휴학을 선언하고, 연구실도 어느 날 갑자기 학장 명령에 따라 출입이 봉쇄되었다. 다행히도 나는 이미 피험자 대상 실험이 마무리되고 있던 시점이라, 연구 진행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상가가 문을 걸어 잠그고 도시 전체가 락다운(lock down)되는 것을 보면서 일상 생활이 가능할지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언론을 통해 전해 들은 우리나라의 대처에 비하면, 미국의 대처는 다소 급진적이고 강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연구실의 책임 교수도 매우 안타까워하며, 모든 연구원들의 재택근무와 정기적 화상회의를 지시하게 되었다. 나의 경우는 이미 모은 데이터를 매주 분석하여 화상으로 책임교수와 검토하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실험이 종료되면 분석 과정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 곳 실험실은 공학적인 해석에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관찰된 결과치 마다 수학적 모델링을 진행하여 그 기전을 유추하고 측정하지 못한 실험결과에 대해서도 예측값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가설과 다른 현상이 관찰되는 경우 이를 풀어가는 방식 또한 달랐다. 부끄럽지만 나의 경우 새로운 현상을 상세히 기술하는 수준에 그쳤던 것 같은데, 이 곳에서는 기존 모델링 공식에서 오류를 찾고 더 좋은 공학적 모델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상대적으로 수학적 지식과 공학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능력이 부족하였는데, 함께 연구를 수행한 공학박사 동료의 도움으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이는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 기간 동안 얻은 큰 수확이다.
2달간의 실험실 패쇄 후, 미국 COVID-19가 다소 진정되면서 UCI도 이제 phase 2, 즉, 점차적 개방으로 정책을 변경하였다. 이에 다시 실험실 출입이 가능해졌다. 화상으로 진행되는 연구는 데이터 분석과 논문 작성에 큰 어려움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자유 토론과 파일럿 실험이 필요한 새로운 연구 구상은 역시 연구자들 사이 대면이 중요한 것 같다. 이제 남은 미국 체류 기간 동안 새로운 실험을 설계하여 마무리하는 과정까지 경험해 보고자 한다. 더불어 미국 학풍과 사회적 특성이 우리나라와 어떻게 다른 지 유심히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주신 본교의 이비인후과교실과 선후배 교수님, 스승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